성경(Bible)이야기/로마서(강해설교)

11.율법과 양심에 의한 심판과 그 원리(롬 2:11-16)

Wisdom of Universe 2025. 2. 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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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2 :11-16)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I.서론

본문은 인간에게 이신득의 은혜가 절대 필요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으로서의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그리고 스스로의 행위로는 결단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무능에 대하여 설파하고 있는 1:18-3:20 기사의 연속 부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롬 2:1-5절에서 도덕군자 및 남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경고하는 내용과 이방인과 유대인을 불문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중적 보편성, 즉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심판의 원리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시간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성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은 각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율법 있는 유대인에게는 율법에 근거해서,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는 그 마음에 새긴 율법 곧 양심에 근거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본문은 선민의 자손인 유대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신득의 은혜가 전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요청됨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로마서 2:11-16절 말씀을 함께 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II.본론

 

1.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롬 2:11)

 롬 2:6-11 절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겨냥한 매우 중대한 진술을 합니다. 롬 2:11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논지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 법이 없으시고 각 사람이 행한 그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독단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서 한 발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라는 뜻입니다. “프로소폴엠프테스”(partiality, 불공평, 외모로 사람을 취하다)는 문자적으로 “얼굴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즉, 어떤 사람의 신분 때문에 그 사람을 고려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공평함의 정확한 개념을 정의의 여신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리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 앞에서 재판받는 사람이 누군지 볼 수 없고 따라서 피고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편파적으로 판결할 유혹을 받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때로 정의의 여신상은 손이 묶인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뇌물을 받을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최고의 인간의 법정에도 불공평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날에는 불공평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완벽하게 아시고 완벽하게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완벽하게 공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지위나, 교육, 영향력, 인기, 외모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시는 데 절대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고넬료의 삶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았을 때, 그동안 이방인을 향해 품었던 편견을 극복하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show partiality)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하나님의 공의는 바울의 선언에도 암시됩니다. 바울은 주인들에게 종들을 배려하라고 경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바울은 골로새서 신자들에게 이렇게 단언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5).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2.율법 없는 이방인과 율법 있는 유대인에 대한 심판기준(롬 2:12)

 로마서 2:12절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바울은 여기에서 뚜렷이 다른 두 죄인 그룹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 기회가 없었던 죄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그룹을 말합니다. 다른 한쪽은 율법을 알 기회가 있었던 죄인들입니다. 이는 율법 있는 유대인 그룹을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 있었습니다.

 

먼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왜 율법이 없이 망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1장에서 창조 세계의 증거를 통해,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댈 수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롬 1:20).  또한 이들은 그 마음과 양심이 옳고 그름을 증언하기 때문에(롬 2:15) 유죄이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한 이방인들은 또한 율법 없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2:12).

 

물론 이방인들의 영원한 환난과 곤고는 유대인들, 곧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는 자들보다는 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긴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을 마주한 종들을 예로 들며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맡기신 유대인들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 비해 율법을 아는 이점이 없었던 자들인 이방인들은 그가 하나님에 관해 가진 제한된 지식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뿐만 아니라 신약의 복음을 아는 자들도 심판을 받는 자들의 이 두번째 범주인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 그룹에 속하게 됩니다. 이들은 옛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을 훨씬 많이 알기에 훨씬 큰 책임이 따를 것입니다. 이들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같을 것인데, 이 유대 성읍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이적을 보았으나 그분을 자신의 메시아요 왕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특권까지 누렸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냉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과 소돔 같은 이교도 성읍들이 이들보다 나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마 11:20-24).

 

모든 불신자가 지옥에 있을 테지만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가장 큰 영적기회를 허비한 자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배교자들, 곧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심지어 인정했으나 결국 그 진리에 등을 돌린 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3.율법의 본래적 기능은 정죄와 심판의 기능입니다(롬 2:12)

 롬 2:12절 말씀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2:12절 말씀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이해를 뒤집는 말씀입니다. 여기 한 절에서만 무려 “율법”이라는 단어가 4회나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느꼈던 율법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가히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최고의 것, 절대적인 것, 손에서 놓으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이방인들이 멸망당하고 저주받는 것은 바로 이 율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요 7:49).

 

요한복음 7:49절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믿는 일반 유대인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요 7:19). 물론 그와 반대로 자기들이 의롭게 되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율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들에게 절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방인이 망하는 것은 전혀 율법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로 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강조점을 잘 보시기 바람니다. 그는 율법을 의롭게 되는 것이나 혹은 구원, 영생과 관련시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심판, 정죄와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율법은 본래적으로 구원 혹은 의롭게 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죄 혹은 심판과 더 관련이 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까? 죄를 드러내기 위해 주셨습니다. 죄를 죄로 알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롬 5:20 ;갈 3:19). 로마서 5:20절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갈 3:19절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조차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아래 있음을 확정짓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롬 3:19). 이것이 율법의 본래적이고 사실적인 기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9-10에서 그의 회심 이전을 회상하며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갈 2:16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율법의 기능은 정죄와 심판입니다. 바로 율법의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알때 우리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더욱 절실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중하며, 요청되는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을 가리켜 갈 3:24절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베드로의 증거대로 생명의 구주를 못박지 않았겠지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기쁘고 감사, 감격하는 마음으로 받았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것을 깨우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역시 이러한 마음으로 구약 특히 율법을 보아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가 마음의 변화를 받고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통해 우리 예수님이 베푸신 구속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중한가가 새록새록 느껴져야 합니다. 그러한 은혜가 넘쳐나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의인입니다(롬 2:13)

 로마서 2:13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로서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러나 너무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듣는 일을 매우 중시하였던 사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물론 예전부터 그러했지만 B.C 586년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듣는 일은 하나의 두드러진 민족적 특질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램 성전의 파괴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이때로부터 율법을 듣는 일에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율법을 들음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실을 스스로 확인했습니다.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선민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회당(synagogue)이 생겨난 것도 다 이때문입니다. 회당은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입니다. 율법을 중시한 유대인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 회당을 세운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팔레스틴에도 회당이 여럿 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에는 헤롯 성전이 화려하게 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팔레스틴 도처에 회당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만큼 율법 듣는 일에 열심이었나를 반영합니다. 그 열심은 조금도 식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율법을 듣는 그 자체만을 중시했지 왜 그 율법을 듣는지 그 이유를 망각해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왜 듣습니까? 귀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일만을 지나치게 중시하다 보니 그런 감각이 이들에게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고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많은 고민과 아픔을 안고 그것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인식이 서서히 희박해져 갔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상황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됩니까? 유익을 줍니까? 아니 굳이 이러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의롭게 해줍니까? 그들로 선민이 되게 해줍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착각 속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착각 속에서 빨리 헤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4-25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7:24,25).

 

그러므로 오늘 우리 역시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로 개신교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배도 말씀 선포 위주입니다. 교회의 모든 모임은 물론 성례전에도 말씀이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으로 모든 성도된 의무를 다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주일날 교회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오면 마치 자신이 거룩해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뭐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이 잘못된 의식에서 깨어납시다. 하나님께 정말 인정받는 사람은 말씀을 열심히 듣는 성도가 아닙니다. 요셉과 같이, 다니엘과 같이, 모르드개와 같이 내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그대로 지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기신 또 하나의 율법입니다(롬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이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양심이 그 마음에 새겨진 또 하나의 율법이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을 가지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은 율법을 받지 않았으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양심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새기신 또 하나의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문자적 의미로 “양심(conscience)”이란 “함께 아는 지식(co-knowledge)”입니다. 혼자만이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서로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정당성을 지닙니다. 그런 점에서 양심은 또 하나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주시기 이전부터, 아니 인간 창조 당시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주신 것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의식도 가질 수 있으며 의지적 선택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본성적으로 받은 양심의 빛은 그것이 아무리 희미하다고 해도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의식을 인간 의식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문자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십계명의 제 5-10계명과 동일한 것입니다. 성경은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러 군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왔을 때)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행 23:1). (바울이 공회 앞에서 증언할 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베드로가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그러한 의미에서 율법을 받지 않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양심이 문자로 기록된 율법의 기능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한 양심은 그 본래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양심의 기준은 시대와 개인이나 민족에 따라 차이가 있게 마련이며, 죄를 반복하여 짓다 보면 양심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무엇이 죄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능이 마비된 양심을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딤전 4:2).

 

모든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양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상 사람들이 악을 밥먹듯이 행하는 것은 다 그 양심이 화인을 맞아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주어진 양심의 율법이 사람 속에서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 없는 자라도 장차는 자기 양심의 정죄를 받아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양심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율법의 요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양심의 지시에도 충실하게 따름으로써 언제나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6.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롬 2:16)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 심판을 언급합니다. 롬 2:16절입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이제까지 이끌어 온 논중 그대로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판단과는 달리 한 치의 오차나 그릇됨 없이 인간의 숨은 죄까지 낱낱이 찾아 정확히 징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이제까지 이끌어온 논증과는 전혀 다른 대단히 중요한 사실 하나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이제까지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따라 내렸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논증에 따르면 이제까지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 내렸습니까?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 모두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어김이 없었습니다. 예외가 없었습니다. 정확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정적인 변화가 옵니다. 결정적인 변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최후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유무에 근거해서”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후자를 취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란 말에는 좀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 말에는 예수를 믿는 자도 동일하게 심판을 받지만 그는 멸망의 심판에서는 제외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6,7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는 자” 곧 믿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신다는 본 절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역시 이제까지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방식 그대로 지극히 은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것이요, 역으로 예수 믿는 성도는 심판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멸망의 심판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비교한다면 애굽에서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를 치실 때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 가정은 죽음의 사자가 피해 갔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때 온 애굽은 통곡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곡소리가 나지 않는 가정이 없었습니다. 애굽 모든 가정의 장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축의 초태생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단 한 가정의 예외도 없이 다 무사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예외가 최후 심판 때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적용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애굽에 대한 심판보다 더 철저하고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때는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만 치셨지만 최후 심판에서는 단 한 사람의, 단 하나의 죄도 예외없이 다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는 완전한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불완전한 의를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의를 온전히 행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은혜를 믿고 삶의 방향을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3:28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단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의 옷을 입혀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참으로 놀랍지 말씀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깨달은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듣고 감격한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도저히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복된 소식이라는 고백과 감격이 이 표현에 짙게 배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표현이 가슴에 와 닿습니까? 바울의 감사와 감격, 흥분이 여러분의 것으로 실감이 나십니까? 실감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복음이 됩니다.

 

III. 결론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가장 큰 강조점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그 행한 대로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기준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법을 아는 사람만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양심이라는 율법을 근거삼는다는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창세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준비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죽음을 피할 뿐 아니라 마지막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들림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기쁜 소식을 바울이 “내 복음”이라 한 것처럼 오늘 우리는 우린 이렇게 주님이 주신 기쁜 소식을 “나의 복음”이라 외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만천하에 “나의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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