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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dom of Universe 님의 블로그

09.도덕군자 혹은 유대인들의 죄악상(롬 2:1-5) 본문

성경(Bible)이야기/로마서(강해설교)

09.도덕군자 혹은 유대인들의 죄악상(롬 2:1-5)

Wisdom of Universe 2025. 2. 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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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2 :1-5)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I.서론

본문은 인간에게 이신득의 은혜가 절대 필요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으로서의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그리고 스스로의 행위로는 결단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무능에 대하여 설파하고 있는 1:18-3:20 기사의 연속 ‎부분입니다. ‎바울은 1:29-31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온갖 역겨운 죄에 빠진 자들을 엄히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부분을 읽고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 이들 이방인들보다 더 올바르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사람들,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겉보기에 덕스럽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가? 아마 여러분도 궁금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1장에서 묘사한 심히 부도덕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평가에 진심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특정한 도덕 행위와 종교 행위를 하면 의로워진다고 믿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모세 율법과 랍비 전통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심지어 자신들은 유대인 곧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행위를 통한 노력이 실패하더라도 땅에서 상을 잃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여전히 면한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교도 이방인들을 그들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때문에 심판하실 테지만 이러한 정죄를 그 어떤 유대인도 절대 받지 않으리라 확신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걸핏하면 이렇게 말하길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중에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며 이방인과 유대인을 서로 다른 잣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어떤 랍비들은 가장 악한 유대인이라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아브라함이 지옥문 앞에 앉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정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절대로 이르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구원을 이해하거나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희망을 버린 사람보다 겉보기에 도덕적이고 친절하며 ‎자상하지만 자기 만족에 빠진 사람에게 복음으로 다가가기가 대체로 더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부도덕한 이방인에게 그들이 그리스도가 없기에 잃은 자라는 ‎것을 보여준 후, 유대인과 같은 도덕주의자에게 하나님 앞에서 그들도 똑 같은 죄인이며 정죄 받았다는 것을 강력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하고 경고하는 동시에 그들 또한 죄 아래 ‎있는 자들임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 득의” 은혜가 필요함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II.본론

 

1.‎ 자신들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유대인(롬 2:1)

 앞선 1:18-32에서 사도 바울은 타락한 이방인들의 범죄의 실상과 더불어 그로 인한 하나님의 ‎유기에 대하여 논증한 바 있습니다. 이에 이어지는 본문 롬 2:1-5에서는 바울은 그 비판의 칼날을 ‎유대인에게로 향해 들이댑니다.‎ 롬 2:1절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첫째, 2:1절에 보면 이들은 이방인의 악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유대인의 특징적인 기질입니다. ‎둘째, 4절에 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으로 회개케 하는 은혜의 풍성함을 받았던 자들인데, 이는 유대인들이 언약의 특권하에서 누렸던 특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절의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유대인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표현한 제유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는 유대인을 가리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롬 2:17에서 분명해집니다. 2:17은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특히 이방인들을 판단하면서 그들이 영적으로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말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관심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롬 2:1)는 모든 도덕주의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자신은 바울이 방금 언급한 이방인의 극단적인 부도덕에 빠지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 역시 다른 사람과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을 가리킨다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떠한 잘못을 범하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해서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자부하며 의롭게 여기고 회개하기를 거부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만 열심을 기울인 것이었습니다. ‎실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동일한 모양의 죄를 행하면서도 오히려 이방인들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배경에는 그들이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지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나타내려면 그에 합당한 의의 열매를 내야 했는데, 열매는 없으면서 단지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이유만으로 의인으로 자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는 심판이 예비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마 ‎‎3:9,10). ‎누가복음 3:8절은 이런 위선적인 유대인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이렇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이든지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것 역시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인데, 유대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행사는 발견되지 않고 그들의 아비인 ‎마귀의 행사만 눈에 뛸 뿐이었습니다(요 8:39-44).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요 8:44).‎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인정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심각한 죄들에 대해서만 지적했습니다(롬 1:18-32). 21가지 죄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다른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스스로에 대해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한데,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인이라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도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방인의 범죄에 대해 정죄하는 위선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을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대에 고소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행위에 대하여 달리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악행에 대해 단 한마디도 변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바울이 여기에서 유대인을 정죄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악한 이방인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으면서(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가르침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또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 6:37)‎.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월성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결함에 대한 무지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와 관용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법에 대한 가르침도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죄가 조금 덜하다고 남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세리와 같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눅 18:13)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

 

‎2.‎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 동일하신 하나님의 심판기준(롬 2:2-3)

롬 2:2절에 보면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또 계속해서 2:3절을 보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 생각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정확성입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우리” 속에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물론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도 포함되는 게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이루어진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자신들은 예외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상기시키면서 단지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그릇되었음을 경고하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

 

하나님의 판단은 오직 진리(truth)대로만 이루어진다. 그것은 겉모양으로 위장된 것에 반대되는 ‎실재(reality)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를 판단 기준으로 삼으신다. 그분이 유대인들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졌다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있는 그들의 실재의 모습인 것입니다(롬 2:11). ‎선인지 악인지를 가리는 하나님의 판단은 사실 그 자체를 가리키는 바로 이 진리에 기초되어‎(NIV, is based on truth)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기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육적인 혈통을 가지고 자신의 의로움을 결코 강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바울의 이 증거는 또한 오늘날 우리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적 이름이 우리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 죄씻음을 받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비로소 그분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선민이라는 우월 의식 아래 어떤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기에, 단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외형적 조건 때문에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들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을 향한 호소이며,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판단을 피해가는 면책 특권이 될 수 없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각 사람이 실제 마음에 품거나 행동으로 나타낸 바로 그것에 기초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은 앞의 1:18-32에 나오는 이방인의 범죄를 판단하면서 자신들 또한 그들과 같은 범죄를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판단은 결국 자신들을 향한 판단이요 ‎정죄였던 것입니다. ‎동일한 범죄를 행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을 판단하는 범죄까지도 행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방인을 향한 그 판단과 정죄를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했으며(겔 18:4), 악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외 없이 하나님의 판단과 정죄를 받게 된다는 사실만이 진리인 것입니다. ‎

 

하나님은 사무엘선지자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엘리압)이 누구입니까? 이새의 장님이며, 다윗의 형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선지자가 용모가 출중한 엘리압에 기름부으려 하자,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외모를 보지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더라도, 누구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이 모두가 받아 마땅한 죗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함으로써 준비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유대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세가지의 은혜(롬 2:4)

 롬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소개합니다. ‎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다소 말의 뜻을 어렵게 보이는 문장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유대인에게 인자하시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목적은 너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여 오히려 죄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하나님의 그 은혜를 멸시하느냐?”. 이러한 의미의 본절은 바울이 공의롭게 운영되는 하나님의 법정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교만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

 

첫째, “인자하심”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토스”“선함”, “올바름”,친절”, ‎‎“너그러움”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나타냅니다. 인자는 ‎신자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2, “자비”). 그들은 이와 같은 그분의 인자를 멸시하고 ‎악용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

 

둘째, “용납하심”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케스”“머뭇거림”, “관용”, “너그러움”이란 ‎뜻으로 “보류하다”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또한 원수와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는 일시적인 휴전이란 ‎의미와 유사하다(W. Barclay). 그런데 휴전이란 전쟁의 종식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쉬는 것뿐이므로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심판이 끝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잠시 심판을 보류하신 것뿐이며, 이 보류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그분의 은혜에 참예하기에 충분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를 오해하고 악용해 오히려 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셋째, “길이 참으심”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미아스”“인내”, “관용”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원수를 향한 복수나 범죄자가 받을 형벌을 자발적으로 보류하는 강력한 통치자에게 ‎사용되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은 모든 인류에게 ‎확대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길”원하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9). ‎인자하심은 하나님이 온갖 혜택을 베푸심을 가리키고, 용납하심은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심을 ‎가리키며, 길이 참으심은 이 둘이 지속됨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에게 베푸시는 ‎일반 은총 또는 섭리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성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크신 은혜를 계속해서 ‎멸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세 가지 풍성하신 은혜는 자신들에게 임하는 그분의 심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성한 은혜들이 그들에게 특권으로 주어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는데 그들은 어리석게도 그 기회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

 

 4.‎ 회개하지 않으며 진노를 쌓고 있는 유대인(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롬 2:5절에서 사도 바울은 가장 위험하고 저주받은 형태의 인간의 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치 아니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잘 보셔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회개를 모르는 마음입니다. 회개할 필요도 못 느끼며, 회개할 의사도 없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회개할 것 없는 의인”(눅 15: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물론 이것은 바리새인을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렇게 마음이 완고한 것은 바리새인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회개할 것이 많은 죄인이라고 하면서 자신들만큼은 회개할 것이 전혀 없는 의인이라고 자부했던 것입니다(눅 18:11). ‎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다시말하면, 이 모습은 바리새인 자신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세리와 ‎같이 남의 돈을 착취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벌이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위의 문장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러나 네 완고함과 돌이킬 수 없는 마음 때문에”가 됩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잠 16:2 ;렘 17:10)의 눈에 비친 유대인들의 내적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회개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지 않고 도리어 그 인자하심을 ‎외면함으로 깊은 죄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첫째는 그들의 “완고함”입니다. 여기서 “고집”으로 번역된 “스클레로테타”의 원형 “스클레로테스”“굳음”이라는 뜻인데 유대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거대한 장애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뻔뻔스러웠고, 완고하고 도리어 어두운 마음에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죄에 대해 뻔뻔스럽게 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경화증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치 동맥 경화증이 인간 육체의 건강에 있어 치명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완고함이 ‎인간의 영적 건강에 있어 치명적임을 잘 보여줍니다.‎

 

둘째는 그들의 “회개치 아니한 마음”입니다. 이는 “잘못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않는, 즉 뉘우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지.정.의 모든 상태의 마비 현상을 가리킵니다. ‎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슬퍼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돌이키는 이들에게만 유효하지만, 어떤 동기에서든지 죄악을 범하고서도 완고한 마음으로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인자를 계속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가차 없이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 계속 죄를 떠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심판날에 자신에게 임할 진노를 쌓는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속히 그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롬 2: 5절에서 사도 바울은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최후 심판 때 임할 진노를 쌓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하)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자백할 줄 모르는 모든 사람은 다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 집행되지만, 그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은혜를 오히려 죄 짓는 기회로 삼으면서 완고함과 돌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

 

본문에서 “진노의 날”, 즉 “헤메라 오르게스”는 16절에 진술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있을 공의로운 최후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이는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즉 공의로운 심판이 어떤 것인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곧 “진리대로 되는 심판” (2:3)이며, “외적 조건이 아닌 내적 ‎실체를 보고하는 심판” (2:11 절)입니다. ‎

 

따라서 하나님은 그날에, 지금 바울에 의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그 악한 실체를 보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자기의 심판거리를 바로 자기 자신 속에 하나하나 쌓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쌓는도다”의 의미는 “돈과 재물을 저축하는 것처럼 쌓아나가는 것을 뜻합니다”(마 6:19;눅 ‎‎12:21;약 5:3). 이 동사는 현재 시제로 쓰여 당시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자신들에게 임하게 될 심판거리를 쌓아가고 있음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진노에 대한 묘사로 그치지 않고 “그렇게 하지 말라”라는 강한 부정 명령의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II.결론

마무리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과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받을 줄로 여기며 이방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얻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호소할 자리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장차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자비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와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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