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Wisdom of Universe 님의 블로그

06.그리스도의 복음(롬 1:16-17) 본문

성경(Bible)이야기/로마서(강해설교)

06.그리스도의 복음(롬 1:16-17)

Wisdom of Universe 2025. 1. 31. 13:59
반응형
SMALL

(본문: 롬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나니 이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I.서론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택하라고 하면 바로 오늘 말씀을 전하는 이 본문일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는 가장 순수한 복음이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아마 본문을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 두 절이 로마서 전체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한 사람의 시간과 영원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 두 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요약한 것이다” 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이 복음을 전개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절에 담긴 의미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II.본론

 

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

 

바울은 1:16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으로 그가 복음을 자랑한다는 것을 강조하려 사용한 어법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담대함”은 참된 영적 지도자의 최종적인 표식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고,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났으며, 다메섹과 베뢰아에서 몰래 빠져나왔으며, 아덴(아테네)에서 비웃음을 샀고, 고린도에서 바보 취급을 받았으며, 예루살렘에서 신성모독자요 율법파괴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도록 버려졌습니다. 바울 당시에 어떤 이교도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무신론으로 여겼고 주의 만찬을 오해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협박으로 바울을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나 아덴 또한 고린도에 있는 학식 있고 영향력 있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당시 거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이교도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 ‎어떤 반대에도 절대로 단념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비난에도 낙심하지 않았고, 그 어떤 이유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듯이, 당시에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복음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길이며, 바울은 어디를 가든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선포하는 특권을 받은 것 때문에 크게 기뻐했을 뿐 아니라 담대했습니다.‎ 참신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구주와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심각한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할 기회가 있을 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한 것을 압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한 것을 압니다. ‎또한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경건하지 못한 영적 체계에는 매력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위협적이고 불쾌하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의 죄, 악함, 부패, 상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교만은 가증스럽고 “행위에 기초한 의”(works righteousness)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가치하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의 죄악된 마음에, 복음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을 처음 들을 때 복음을 제시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복음을 논박하는 논거와 이론을 제시하기 ‎일쑤입니다. 여러분, 아마 이런 일을 많이 당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크리스찬들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반대 논거를 논박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복음의 증언을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물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숱한 교회를 휩쓴 이른바 “건강과 부의 복음”은 세상이 원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세상의 입맛에 맞는 복음만을 전합니다. 따라서 세상은 이런 복음을 불쾌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은 거짓복음인 것입니다. 이런 거짓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유대주의자의 거짓 가르침처럼, 이것은 “다른 복음” 즉, 복음이 아니라 불경건한 왜곡일 뿐인 것입니다(갈 1:6-7).‎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6-7).

 

‎예수님께서는 “세상적 성공과 안락”이란 동기를 강하게 정죄하셨으며, 이런 동기를 좇는 자들은 사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장 간절한 바람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안락이나 ‎인기나 평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에 관해 눈곱만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삶을 영원히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단어 4가지를 사용합니다. 능력, 구원, 믿음, 의입니다.‎

 

 ‎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무엇보다도,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이나마이트”(dynamite)라는 단어는 헬라어 “두나미스”(dunamis, power, 능력)에서 왔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수반하며,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을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옭아매려는 사두개인들을 꾸짖으며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이기고 영적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선한 행위나 교회의 의식이나 사람의 어떤 수단도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고 이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몰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주신 명령을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전하니,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라고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일 후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다 행하리로다” 하는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다 지켰을까요? 아니요…지킬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다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에게 “동물의 피를 통한 제사법”으로 그들의 죄를 대속할 위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

 

이제까지 율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3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능력이 있으신지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 이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이었을 때”에 죽으신 것이 아닌,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

 

또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할 수 있습니까? 네…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네…하나님은 우리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정죄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그 당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갈 3:13). 맞습니다. 우리가 저주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리신 저주가 예수님께 전가된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전가”‎라는 개념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더 좋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 “복음”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초림도 이러할진대,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얼마나 영화로운 일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복음)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의 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세상이 보기에는 전혀 불합리한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곧 하나님이 ‎사람들을 어둠의 영역에서 빛의 영역으로 옮기고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권리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고대 이교도들은 기독교를 조롱했습니다. 기독교의 대속개념이 그 자체로 터무니없기 때문일 뿐 아니라 신화에 나오는 자신의 신들은 냉랭하고 무심하며 멀리 있어 인간의 안녕에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돌보고 구속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하나님”이란 개념은 그들의 이해를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후 2세기 말에도 이러한 조롱은 여전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켈슈스(Celsus)는 기독교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교양있는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분별 있는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하라.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지한 자라면 누구라도, 감각과 교양이 부족한 자라면 누구라도, 바보라면 누구라도,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라”. 이리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인간의 지혜에 기초하거나 인간의 이해력에 호소하려 하지 않았기에 고린도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같은 서신에서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사가 많고 성숙했더라도, 모든 신자는 인간적 한계와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과 지각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은 구속하고 유지하는 그분의 능력이 전달되는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3. “구원을 주시는”(롬 1:16)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이들의 본성을 바꾸며,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십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민이 반역했는데도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그들을 구원하셨다”(시106:8)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 ‎온갖 병자를 고치고 걷지 못하는 자들을 걷게 하며 폭풍을 잠잠하게 하고 심지어 죽은 자들을 일으킴으로써 신적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은 “소테리아”(구원)라는 명사를 19회 정도 사용하는데 그 중에 5회를 로마서에서 사용하며, 상응하는 동사를 29회 사용하는데 그 중에 8회를 로마서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기본 개념은 ‎구조 또는 구출이며, 여기서 핵심은 구원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을 죄에 대한 궁극적 ‎형벌에서 건져내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고통당하는 “영적 죽음”에서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salvation)과 “구원받음”(being saved)같은 용어들을 거부하고, 이 용어들이 전달하는 개념이 시대에 뒤지며 현대인들에게 무의미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용어이며,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에게 아들의 희생을 통해 제시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용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죄로부터, 사탄으로부터, 심판으로부터, 진노로부터, 영적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를 테면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며, 하나님은 그 손을 내려 사람들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이 “패역한 세대”의 영적 감염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행‎2:40). 잃음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마18:11).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마 1:21).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롬 5:9).‎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그들의 크고 자의적인 영적 무지에서(호 4:6; 살후 1:8), 그들의 악한 방종에서(눅 14:26), 거짓종교의 어둠에서 건져냅니다(골 1:13; 벧전 2:9). 그러나 구원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4. “모든 믿는 자에게…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과 관련된 세번째 핵심단어는 “믿음”입니다. 복음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피스튜오”(pisteuo, believe, 믿는)의 기본 의미는 “신뢰하다”, “의지하다”, ”믿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구원과 관련해 사용될 때 대개 현재형이나 진행형으로 사용되며 “믿고 있다”(is believing)‎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일상이 믿음의 행위로 넘쳐납니다. 우리는 지하철공사현장을 지나면서 그 철판덮개는 무너지지 않을 것을 믿고 자동차를 그 위로 지나갑니다. 우리는 비행기로 베트남의 “다낭”으로 타고갈때 그 비행기가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삼다수 플라스틱병에 든 물을 마실 때에도 그것이 독이 안든 “안전한 물”이라는 믿음으로 물을 마십니다. 숱한 것을 암묵적으로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삶의 전부가 자연적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염두에 두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초자연적 믿음이며, 이 믿음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으로 얻고 또 사는(live)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 하나님은 먼저 사람들에게 행동을 요구하지 않고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바르게 행동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늘 미치지 못 미치기에 아무도 자신의 선한 행위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선물일 뿐(엡 2:10) 구원의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선함, 행위, 지식, 지혜를 포기하고 종결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행위를 신뢰함으로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민족과 인종의 장벽이 없으며,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데 먼저는 유대인이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민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구원이 유대인을 통해 오도록 정하셨습니다(요 4:22). 메시아는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오셨습니다(마 15:21).‎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진정으로 믿는 자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5.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바울이 여기서 복음과 관련해 사용하는 네번째 핵심 단어는 “의”(righteousness)이며, 그는 이 용어를 ‎로마서에서만 35회 이상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작동시키며, 이러한 ‎주권적 행위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옮기는 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옮기면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자신의 의를 주신다는 의미가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나타날(revealed) 뿐만 아니라 이들의 것으로 간주되는(reckoned) 것입니다‎(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또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복음을 마련하시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에게 의롭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그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6. “믿음으로 믿음에”(from faith to faith)

 

“믿음으로 믿음에”(from faith to faith)는 로마서 1:16의 “모든 믿는 자”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이며, 마치 ‎바울이 각 신자의 믿음을 하나하나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박국 2:4을 인용하면서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하며 암시하듯이, 각 사람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롬 ‎‎4:3; 갈 3:6; 약 2:23). 이것은 아브라함 이전과 이후의 모든 사람의 참 믿음이 의로 여겨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히 11:4-40)‎.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의 연속성입니다. 믿음은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의롭게 ‎된 참신자는 평생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라고 부릅니다(골 1:22-23 ; 히 3:12-14).‎

 

 III.결론

 

마무리하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써 보낸 후 3~4년 후에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가 주후 61년 초 무렵입니다. 그후 그는 감옥에서 지내기도 하고 풀려나기도 하면서 로마에서 3년 가까이 머물렀고, 계속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네로 황제의 칼날에 바울이 순교를 하던 64년경,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에 간지 3~4년이 지나자 로마 시내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어떤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네로 황제가 핍박을 시작해서 바울을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고 그리스도인들을 처참하게 죽일 때 로마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유대인만 2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이 아닌 민족 중에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사가들이 그들의 기록에 사용한 “거대한 군중”이라는 표현을 참고하면 그 수가 대단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로마교회가 그와 같이 넘치는 열매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다이나마이트처럼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마련하시고 누구든지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의롭다 하심”을 받도록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

 

우리는 2000여년 전에 목숨을 담보로 하는 박해와 핍박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한 믿음의 선조들을 ‎본받아 행위를 통해서 의를 이루려는 육신적인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여 말세의 다가오는 어떤 환난과 시련에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반응형
LIST